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7. 7世 〉28. <절제공>모헌공휘방행록(慕軒公諱方行錄)
1. 문헌 목록 〉8. 8世 〉2. <요재공>사헌부지평공휘부묘표(司憲府持平公諱溥墓表)
1. 문헌 목록 > 8. 8世 >  
1.<요재공>태인공휘연묘갈명(泰仁公諱淵墓碣銘)
泰仁公墓碣銘 玉川之檻村向午而合封者故縣監趙公諱淵字深遠及其夫人寶城宣氏之藏也趙氏系出玉川檢校公諱璋高麗中葉致身清要啓後人忠考之源天之報施可槩矣三傳至玉川君諱元吉當麗末協志協圃冶高尚其罔候之義 贈諡忠獻是生瑛官至典工判書 我太宗朝累徵以世子師傅終不就父子幷爲麗氏全節寔公父祖以上也公穎慧莊重幼如成人自至劬書文藝夙就十歲内外詩賦大篇傳誦膾炙良知愛敬志體兼養病致其憂喪致其哀服闋猶月朔省塋鄉里稱服焉以孝學薦除泰仁縣監有清德善政碑及詩若文己經龍巳之兵燹今無可據喜惜哉公五男彭齡昌城敎授與河西金先生麟厚爲道義交彭壽彭佑彭老彭世皆隱德不仕長房孫玉堅參奉淑堅啓功郎錫堅參奉應堅參奉玉堅男汝忠參奉壬辰亂首倡募義赴錦山戰斬獲居多錄宣武原從勳淑堅男元凱訓導錫堅男珍參奉應堅男汝憲汝厚 宣陵參奉汝寬 贈持平當壬辰亂與趙重峰同日而殉節吁亦盛矣向所謂報施之天其在斯耶後孫鳳柱奉狀走帶方寓舍徵爲表隧之文老病不敢爲役而修辭亦有不敢刪畧而使入刻庶樵牧無輕折楸檟矣 松沙 奇字萬 謹撰 태인공묘갈명(泰仁公墓碣銘) 옥천의 함촌(玉川檻村)에 자라 오향으로 합봉한 묘소는 고 현감 조공 휘 연(淵) 자 심원(深遠)과 그 부인 보성선씨(寶城宣氏)의 유택이었다. 옥천조씨인데 검교공 휘장(檢校公諱璋)이 고려 중엽에 몸을 맑고 요긴하게 다스려 후인의 충효의 근원을 계발하였으니 하늘의 보시를 가히 대충 알것도다. 三전하야 옥천군 휘 원길(元吉)은 여말을 당하여 포은(圃隱) 야은(冶隱)과 뜻을 같이 하야 고상한 그 불사二군의 절의로 충헌이라 시호를 주었고 생휘 영(瑛)은 벼슬이 전공판서로 태종조에서 세자사부로서 여러 번 불러도 마침내 나아가지 않고 함께 고려를 위하여 절의를 지켰으니 곧 공의 부조 이상 이었다. 공이 영민하고 장중하여 어려서부터 성인 같고 스스로 학문을 힘써 문예가 일즉 진취하야 十세에 내외시부 큰 책을 전송회자하고 사랑하고 공경할 줄을 알아 뜻과 몸을 같이 봉양하며 병환에 근심하고 상사에 슬퍼하더니 탈상후에도 삭방으로 성묘하니 향당이 칭송하고 감복하였다. 효도와 학행으로서 천거하여 태인현감을 제수하고 청덕선정비와 및시문 약간편이 있었으나 이미 임진왜란을 겪어 이제 각오가 없으니 탄식하고 애석하도다. 공의 五남 팽령(彭齡)이 창성교수로 하서(河西) 김 선생으로 더불어 도의로 사귀였고 팽수(彭壽) 팽우(彭佑) 팽노(彭老) 팽세(彭世 )는 다 덕을 숨기고 벼슬 아니 하였으며 장방손자 옥견(玉堅)은 참봉이고 숙견(淑堅)은 계공랑이요 석견(錫堅)은 참봉이며 응견(應堅)은 참봉이었다. 옥견(玉堅) 남 여충(汝忠)이 참봉으로 임진왜란에 제일 먼저 창의하여 금산싸움에 다다라 베고 얻은것이 많아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녹훈하였고 숙견남 원개(元凱)는 훈도요 석견남 진(珍)은 참봉이며 응견남 여헌(汝憲) 여후(汝厚)는 선릉참봉이고 여관(汝寬)은 증지평인데 임진란에 조중봉(趙重峰)으로 더불어 같은 날에 순절하였으니 감탄하고 성대하도다. 먼저 말한 보시의 하늘이 그 이에 있는 것인가 후손 봉주(鳳柱)가 행장을 받들고 대방우사로 찾아와서 묘도에 표할 문자를 청하므로 늙고 병들어 감히 수응할 수 없고 수사자를 참히 깎고 대략 써 하여금 새기게 할 수 없으나 초동 목수는 가볍게 벌목을 치지 말기를 바라노라.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謹撰(근찬)
 
1. 문헌 목록 〉7. 7世 〉28. <절제공>모헌공휘방행록(慕軒公諱方行錄)
1. 문헌 목록 〉8. 8世 〉2. <요재공>사헌부지평공휘부묘표(司憲府持平公諱溥墓表)